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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22 인간 송두율과 뱀파이어

하마터면 뱀파이어가 될 뻔한 인간 송두율의 이야기. 

<경계도시2>를 보고 난 뒤 몇가지 남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전향은 말입니다. 테크닉이에요. 기술적으로 접근하셔야 합니다." 

"한국 언론은 관찰자가 아니라 플레이어다." 

"한국에 오신 것을 후회하십니까?" "후회합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 말씀만 해주시죠."


37년 만에 변화된 조국의 분위기를 기대하고 이 땅을 밟은 노 철학자는 기대와는 다른 전개에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이 쪽 아니면 저 쪽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땅에서 경계인으로서 살아온 그의 일생은 모조리 부정되어버립니다. (그를 두고 경계인이냐 아니냐를 규정하는데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그가 말하는 대로 경계인이 그의 정체성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학자로서의 순진함이 북한에 의해 활용된 것이겠지요.) 부인 정정희 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사실상 전향선언을 한 송두율 교수는 구속이 되어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국가보안법에 맞섭니다. 

'승리'를 위해 송 교수에게 전략상 일보후퇴를 권하는 진보진영. 수갑을 차고서야 조국을 찾은 것을 후회한다는 송 교수에게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멘트를 요구한 기자. 그리고 피의 사실을 함부로 공표하고 이를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기사화하는 보수 진보 언론들. 신념을 때로는 기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에서 인간 송두율이 설자리를 좁아 보입니다. 남한의 레드 콤플렉스를 지속적으로 자극해 온 박 홍 총장이 송 교수에게 "예수처럼 좆나게 터지고..." 운운하며 기자에게 "(송 교수가)이미 전향했어."라며 제법 포용력 있는 척 말하는 장면은 아이러니를 넘어 코메디에 가깝습니다.           

자기의지로 위험을 무릅쓰고 조국을 찾은 송 교수가 갈수록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가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진보와 민족주의자들이 섞인 '아군' 중  일부가 송교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욱 괴롭습니다. 그 대목에서 내가 크게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았기 때문일것 입니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던 측이 송교수 개인에게 전체를 위한 후퇴를 요구하며 국가보안법 위반을 시인하고 사과를 주문하는 장면은 '운동'과 '정치'가 과연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가라는 강한 의문을 들게 합니다. 전략과 전체를 들이대는 순간 개인이 지켜온 신념과 양심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립니다.

<경계도시2>를 이어 바로 <데이 브레이커스>를 보았네요. 바이러스로 인해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2019년, 인간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피가 필요한 뱀파이어들은 인간들을 사냥하고 사육해 피를 얻습니다. 주인공은 뱀파이어가 되느니 차라리 죽기를 바랐지만,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가족의 친절로 뱀파이어가 되었습니다. 그도 경계인인 셈이죠. 주인공은 치료제를 개발해 인간과 뱀파이어들의 대립이 끝나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그의 고용주는 치료제의 개발을 원하지 않습니다. 치료제가 개발된다면 인간을 사육해 피를 파는 그의 사업도 끝장이 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이외의 경계인은 또 있습니다. 고용주의 딸. 그녀는 뱀파이어가 되기 싫어 아버지 곁에서 도망쳤지만 결국 다시 잡혀와 억지로 물려 뱀파이어가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신을 먹어 변종 뱀파이어(서브사이더)로 변해 그 사회에서도 격리돼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죠. <데이 브레이커스>에서도 경계인들의 삶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씨발, 노동당원이면서 무슨 경계인이라는거야!"

술에 취해 송 교수의 면전에서 일갈하는 진보진영 인사에게서 우리 안의 뱀파이어를 봅니다. <데이 브레이커스>의 뱀파이어들에게는 공존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기위해 인간의 피를 빨아야하고 또 그로 인해 돈을 벌고자하는 생존욕구와 욕망만이 존재하지요. 인간의 수가 줄어들자  뱀파이어들은 살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먹는 '서브 사인더'로의 변신을 재촉합니다. 인간에서 뱀파이어를 거쳐 괴물로 변해가게되는 것이죠. 우리는 양심을 포기한 인간을 가리켜 종종 괴물이라고 표현 합니다.   

뱀파이어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윌렘 데포는 <데이 브레이커스>의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구에는 아침이면 되면 항상 태양이 뜨지. 이건 변할 수 없는 진리이야. 뱀파이어는 태양과 같이 살 수 없어. 이것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남의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말입니다. 한국 땅이라고 예외가 있을리 없습니다. 나와 당신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자라는 뱀파이어에게 물리지 않도록 항상 경계를 늦춰선 안될겁니다. 

참, <경계도시2>를 보는 동안 송두율 교수의 부인 정정희씨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상황이 변하면서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송 교수 옆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온 인생은 무엇이 되는 것이냐'며 확실하게 전향선언을 거부하는 그녀의 모습. 송 교수가 마지막으로 힘을 낼 수 있었던 원천이라 믿습니다.           

그나저나 직장인도 백수도 아닌 경계인 상태 첫 날인 오늘, 영화 선택이 참 적당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계몽적인 글을 쓴 것이 좀 찜찜하지만 뭐, 저도 가끔은 정화가 필요하니까요. 

덧붙임: 에단 호크, 윌렘 데포, 샘 닐의 조합에 대한 기대로 본 <데이 브레이커스>는 뱀파이어 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주 재미 있습니다. 테이크 아웃되는 혈액 커피, 지하 보도, 주간 주행 모드 탑재된 차량 등 그 상상의 구현이 흥미롭습니다. 뱀파이어 혹은 좀비물이 반복하는 후반부 클리셰가 맘에 걸리긴 하지만 볼만한 장르 영화입니다. <나는 전설이다>보다 스타일리쉬하더군요. 고뇌하는 뱀파이어 에단 호크는 썩 잘 어울립니다. 주인공의 갱생을 이끄는 윌렘 데포는 여전합니다. 개인적으로 <지옥의 묵시록> 이후 좋아하는 배우입니다. 샘 닐은 탐욕스러운 역이 의외로 잘 어울립니다. 

덧붙임2: <경계도시2>를 만든 홍형숙 감독과 같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편한 시간에 갔는데 마침 그렇게 되었네요. 개인적으로 손님을 모시고 온 것 같았습니다. '쉽지 않은 이야기, 잘 만드셨습니다.' 손님이 홍 감독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무어라 한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소심한 인간인 까닭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힘든 여건에서도 꼭 해야 할 일을 하시는 분들께 마음으로나마 화이팅을 외쳐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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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lth